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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알까기

45. 뚜벅뚜벅

by O_pal 2023.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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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걸음이 느리다. 스스로 양반걸음이라 포장하고 있지만 거북이가 따로 없다. 뭐랄까 빨리 걸으면 힘이 드는 건 둘째 치고, 무엇에게 내가 쫓기고 있다는 생각에 긴장감이 든다. 아마 내가 지각할 때 빼고는 느리게 걸어서 그런 감정이 저절로 따라오는 게 아닌가 싶다. 아침잠이 많아서 사실 초등학교 이후로는 집에 바로 중학교가 있는데도 항상 지각이었다. 다들 어떻게 7시에 일어나서 준비 다하고 밥도 먹고 오는지 미스터리였다. 

 

나의 아침은 허둥지둥 얼레벌레 고양이 세수 후 양치를 하고, 교복을 후다닥 입고 머리는 똥머리를 하고 달려 나갔다. 아침은 자동적으로 생략당했다. 이때 이후로 아침을 안 먹은 지 10년이 넘었다. 여하튼, 그렇게 6개월을 생활하니까, 항상 입구에 있는 학주 선생님에게 넌 맨날 이렇게 간당간당하게 오냐! 빨리 들어가라!라는 말씀. 그런 다음 기다리고 있는 3층 계단이라는 고난. 도착해 책상에 앉아있으면 나의 에너지는 이미 10%밖에 남지 않았다. 

 

일찍 일어나보려고 노력해 봤지만 나의 수많은 시도는 실패했고, 아예 늦게 가자라는 잔머리를 굴렸다. 1교시 수업이 9시 시작이니까, 8시 반까지 자고, 천천히 준비를 해서 45분에 출발한 다음 수업 종이 울릴 때 도착했다. 이때 학교 가는 길은 낭만 그 자체였다. 이미 사람들은 다 등교하거나 출근을 하고, 여유로운 거리를 나 혼자 활보하는 기분이란. 늦었지만 여유로웠다. 이때는 학주 선생님도 들어가고 없으셔서 텅 빈 교문에 천천히 들어가고, 계단도 한 계단씩 차곡차곡 느리게 올라가다가 마지막 몇 계단을 남겨두고 울리는 종소리에 들어가면 바로 수업 시작.

 

이때의 기분을 난 아직도 느끼고 싶나 보다. 아침에 고요하면서 맑은 에너지가 기운은 그 시간. 새소리와 나무도 기지개를 켜는 순간. 얼마 안 되는 거리지만 아침의 환호를 느끼면서 가면 활기찼다. 물론 시간이 내가 느리게 간 이유는 달라지긴 했지만 30대가 가까워지는 지금도 난 그 기분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가끔 아침에 나와 걷는다. 그때의 예전과 나의 몸과 마음은 달라졌지만 그 향기를 회상한다. 그때의 나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아이, 늦은 시간에 나랑 비슷하게 걸어가는 몇 명의 아이들, 어제 늦게 잤는지 눈이 풀려 있는 친구, 이런 시간에 오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아 선수처럼 마구 달리고 있는 아이. 나도 저랬던 적이 있기에 무엇이 웃음이 나온다. 

 

지금도 아예 늦은 것 같다 싶으면 그냥 달리기보단 늦게 간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이긴 하지만 (친구들과의 약속에서는 이런 일이 없으니까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면 안 된다) 이상하게 학교나 어디 학원 수업 이런 곳에서는 늦었으면 어쩔 수 없지 하고, 아예 천천히 걸어간다. 학생 때처럼 각 잡고 늦게 가는 일은 이제 거의 사라졌지만, 가끔 늦었다는 미묘한 긴장감과 다르게 여유를 부리고 있는 내 몸을 즐기고 있다. 

 

사실 한동안 칩거 생활을 하면서 예전보다 걷는 일이 줄어들어 일부러 걷고 있는 요즘이다. 방에서 나오기 힘들때는 엄마가 강제로 팔을 잡아당겨 앞에 있는 공원을 산책하고 오거나, 장 보는 것을 도와달라는 이유로 나를 걷게 만들었다. 아빠는 하루에 7500보는 걸으라는 미션을 주셨다. 막상 걸으면 좋긴 한데 나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나라서 습관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혼자 사는 지금 부모님이 전화로 몇 보 걸었냐고 물으시면 당당하게 만보 달성! 이라고 말하거나 아님 이백보도 안 걸었다고 말할 때가 있다. 아주 상극이다. 다른 사람과 다른 걸음걸이로 나에게 저 상당한 숫자를 채우려면 꽤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만보를 채우려면 두 번에 나눠서 걷는다. 아침 또는 낮에 한번, 밤에 한번. 밤의 걷기는 또 나름의 매력이 있다. 어둠 속에 피어난 밝은 조명들이 꽃을 피우고 있다. 나는 밝은 곳을 찾아 헤매는 나방처럼 밝은 곳들을 향해 전진하다가 어두운 곳이 나오면 또 밝은 가로수를 향해 나아간다.

 

밤에는 일을 끝내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만 있는게 아니다. 귀여운 강아지들도 함께한다. 귀여운 생물체들에게 달려가 껴안고 싶은 충동이 들지만 힐끗 쳐다보고, 그들과 눈 마주치는 것에 만족한다. 수많은 강아지들이 많아져 이제는 오분에 한 번 마주치니 밤에는 낮과 다르게 포근해진다. 나만 또 강아지가 없지만 아직 나 돌보기에도 벅찬 나는 그 마음을 꾹 눌러본다. 

 

지금도 이 글을 밤 산책을 걷고 와서 쓰고 있다. 오늘은 밤에 노는 아이들이 없어서 사람들이 없는 순간을 기다리다가 몰래 그네를 타봤다. 사실 의자가 작아 보여서 설마 저번처럼 끼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어른들도 탈 수 있게 제작해 놓은 듯하다. 아주 딱 맞았다. 몇 번 발을 열심히 굴려본다. 옛날처럼 가볍지 않아 각도가 구십 도를 못 넘기지만 여전히 굴릴 때의 바람은 시원하고, 날아갈듯한 기분은 내가 또 뭘 해낼 것 같은 부푼 가슴을 만든다. 오늘도 난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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