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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알까기

26. 일기라는 기록의 시작

by O_pal 2022.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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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는 제대로 써본 적이 초등학교 이후로 없다. 그때의 일기는 하루에 뭐 했는지 시간순으로 써 내려갈 뿐. 내 감정에 대한 기록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커가면서는 일기보다는 수험생용, 공부용 다이어리를 쓰고 며칠 열심히 계획을 쓰다가 앞장만 더러워진 페이지를 연말에 발견하고, 올해는 또 이렇게 가버렸군. 역시 이런 건 그만 사야지. 무계획이 계획이다. 이런 마인드로 살았다. 중요한 일정은 포스트잇에 붙여서 하루하루 뜯어냈다.

나도 이 우울이라는 감정이 커지는 와중에 일기 쓰기를 선택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그렇게 물음표를 뛰어가면서 3년째 내 하루를 써 내려가고 있다. 나의 일기는 하루기록이라기보다는 하루 감정의 기록이었다. 현재 내 기분을 하나하나 나열하고, 그 기분의 출처를 나 스스로에게 되물어가면서 마음의 원산지를 발견해 냈다. 원산지는 다양하다. 부모님, 친구, 나 자신, 남자친구 뭐 여러 가지.

빈 종이를 팬으로 그려가면 내 감정을 객관적으로 제삼자의 입장으로 바라봤다. 내 탓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아닌 부분도 많았다. 내 일상에서의 기분도 하나하나 파악하려고 했다. 내 감정을 허트로 허공에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랬어. 아무 생각이 없어. 이런 말들은 내 입밖에서 더 이상 꺼내고 싶지 않았다. 나쁘든 좋든 내 안에 다양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나한테라도 알려주고 싶었다.

시간기록대로 써 내려가도 그때마다의 기분은 어땠는지 알기 위해 나는 머릿속에 하루의 비디오를 틀어놓고 감상했다. 즐거움, 그 속에 묘하게 느끼는 찝찝함, 약간의 긴장감, 어색하지 않으려고 올라가는 입꼬리. 사소한 행동과 동반되는 감정들을 종이라는 빈 공간에 풀어놨다. 보니까 항상 내가 우울한 건 아니었다. 가족들이 이상한 드립을 칠 때는 약간의 웃음과 기쁨 한 스푼, 상담선생님이 나의 행동에 칭찬을 해주면 아니라고 말하면서 잘되고 있구나라는 안도의 감정.

처음에는 내 감정들의 변화를 파악하고 싶어서 기록했다. 하루가 지날수록 내 감정은 더 풍부해졌다. 우울이라 메마른 땅에 계속 곡괭이질을 해댔더니 쫙쫙 갈라진 땅들이 한 번 다 엎어졌다. 또한 내가 언제 어떤 것에 반응이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분류했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볼 때, 망상이 든다. 왜 욕하고 있는 기분이 들지? 여기서 회피하거나 마주하는 결정 중 난 하나를 골라야 한다. 회피는 내가 고르던 정답지였다. 이번엔 오답을 골랐다. 나가도 사람들이 쳐다보는 느낌이 들어도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고 있지만 생각의 전환을 일으킨다. 내가 참 귀엽나 보다.

그러면 나 스스로 속에서 허, 하면서 비웃음이 나온다. 생각하는 나도 어이없고, 누가 진짜 저렇게 바라보겠나? 누가 이런 생각하는지 알면 진짜 미친놈으로 보겠다 하면서 마스크 속 입꼬리를 올린다. 아직도 밖에 나가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집이 더 편하고, 나가기 싫고. 이제는 나가면 노래를 틀고, 신나게 내가 이 음악의 주인공인 것 마냥 스텝을 밟으며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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