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구하는 자에서 은혜를 나누는 자로
창세기 33:1-11
에서가 다가오자, 야곱은 가족을 셋으로 나누어 뒤에 두고 그들 앞에서 나아가 에서를 맞습니다. 야곱이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니, 에서가 야곱을 안고 입을 맞추고 서로 운다. 야곱의 아내들과 자식들을 차례로 에서에게 절합니다. 야곱이 예물을 사양하는 에서에게 강권하니 그가 받습니다.
에서가 400명의 호위를 데리고 오는데도 야곱은 기도를 통해 평안과 확신을 얻어 두려워하지 않는다. 에서에게 일곱번의 절을 한다. 에서는 그것을 보고 야곱에게 안고 입을 맞춘다. 나는 여기서 에서 또한 얼마나 많은 기도를 통해 야곱을 진정한 용서의 마음을 통해 동생을 찾아간 것으로 보인다.
야곱이 받은 은혜를 에서에게 나눠준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예물을 에서와 나누다. 이 나눔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에서에게 흘러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나누며 함께 기뻐할 대상은 누구일까? 나는 그전에 기도를 해야 한다.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지만 나는 아직 용서의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혼란스럽다.
싸운 것이면 쌍방으로 화해지만 용서는 한 사람의 일방적인 입장이다. 나는 현재 그 감정을 가지기 어럽다. 오랜만에 만난 가해자는 너무 달라져 있었고, 용서를 구하지만 나는 손을 먼저 내밀었지만 진심이 없었다. 내가 먼저 다가가고 사과를 받고 고맙다고 하지만 약간의 위선적인 느낌, 허무함, 거북함의 감정들이 밀려왔다.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신것이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렇게 만나지지도 않고, 만나고 싶지도 않았던 아이가 14년 만에 만났을 때는 대체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것일까? 나의 14년의 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용서라는 마음을 갖기를 원하시는 건가? 나는 하나님께 화가 났다.
너희가 먼저 용서하라, 사랑하라, 섬기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마 우리가 실행하기 힘들어서 말씀으로 남긴게 아닐까 싶다. 나는 기도한다. 사실 내가 먼저 다가가서 사과를 요청한 것도 나는 나를 성장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 아녔을까 싶다가도 용서보다는 분노의 감정이 끌어 올라오면 대체 하나님은 나를 시험하시는 걸까? 피해 갈 수 있는 길을 꼭 건너게 하신다.
아마 이과정을 통해 야곱에게 일어난 내적과 외적의 변화가 일어났듯이 나도 일어나리라 맏는 수밖에 없다. 현재 나는 붙잡고 매달리는 방법밖에 남지 않는 것 같다. 그 아이의 사과 문자가 와도 힘이 들고, 억울함, 짜증남이 밀려와도 나는 묵묵히 견디고 그 애를 용서하는 과정을 계속 생각한다. 심호흡을 하고, 바뀐 그 아이의 모습을 계속 그려본다. 에서처럼 달라진 그 아이의 모습을 계속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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